끄적끄적12: 오버 더 호라이즌
#1 책 소개
굳이 긴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는 한국계 판타지의 대표 격 존재인 이영도 작가의 최신작(맞나? 좀 오래되긴 했는데;)
그동안 연재해오던 중단편 소설들의 모음이라 611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움을 자랑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몇 쪽 안 남아버려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그래도 원체 재미있게 쓰인 글이다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수 있으나 등장인물의 대사와 드립을 외워버리는 수준이 되니 다시 아쉽다...
#2 책 내용
오버 더 호라이즌: 겨울밤, 겨울 폭풍, 겨울의 지평선
오버 더 네뷸러: 자살기도자, 손가락 깨물기, 여름밤의 성운
오버 더 미스트: 밤, 저승사자와 천사, 두 기사단, 징조들이 날뛰는 밤, 아침
골렘, 키메라, 행복의 근원, 에소릴의 드래곤, 샹파이의 광부들
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마을에서 보안관보 티르 스트라이크가 겪는 3가지 기상 천외한 사건들(오버 더 호라이즌, 오버 더 미스트, 오버 더 네뷸러)과 드래곤 라자의 전설적인 마법사 핸드레이크와 그의 제자 솔로처가 겪는 일에 대한 3가지 단편선 어느 실험실의 풍경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 각 오버 더 시리즈는 중편에 가깝고 <어느 실험실의 풍경> 시리즈는 콩트에 가깝다.(나무위키 펌)
모든 시리즈들이 다 재미있지만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골렘'과 '키메라'에 대해 적고자 한다.
- 골렘
(먼저, '골렘'이라는 존재는 판타지 세계에 존재하는 로봇이라고 보면 된다. 주인이 내리는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마법 생명체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사건은 대마법사인 핸드레이크가 본인이 만든 골렘에게 "저 문을 막고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해."라고 한 명령에서 시작된다. 모종의 대화를 마친 대마법사와 그 제자가 아까 내렸던 명령을 잊고 문으로 나가려 하자 골렘은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며 대마법사를 못 나가도록 공격한다. 골렘으로써는 위에서 주인의 명령에 '아무도'라는 키워드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명령을 내린 주체조차도 드나들 수 없게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골렘을 지나갈 수 없게 된 대마법사와 제자는 멍청하게도 스스로가 만든 제약에 걸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갇혀 버리게 된다.
-하지만 이 상황은 또 다른 등장인물인 헐스루인 공주의 지혜로운 조언 한 마디로 해결돼버리고 만다. 그 한 마디는 안과 밖을 구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대마법사와 제자는 골렘에게 '안'과 '밖'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골렘은 안과 밖을 드나드는 존재를 제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고로 지금 있는 곳과 문 밖의 공간을 드나드는 공간으로 정의하지 않고, 그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간으로 이동한다고 정의한다면 골렘은 그 이동 대상자에게 아무런 공격을 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사실 어찌보면 그냥 말장난을 위한 이 에피소드는 개발자인 내게는 코드를 쓰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내가 작성한 코드는 내가 생각한 가설과 그에 기반한 상상을 토대로 작성된다. 그 가설 안에서는 내가 작성한 명령어는 올바르게 동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상황과 만났을 때는 내가 상정한 가설에 허점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 명령어는 내가 생각한 것과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현재 상황에서 명령어가 왜 동작하지 않는지를 가지고 무의미하게 고민하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정한 가설 자체를 의심해보는 것이겠다. 내가 '안'이라 가정한 것과 '밖'이라 가정한 것이 옳게 가정이 되었는지, '드나든다'라는 정의가 올바로 되었는지, '아무도'라는 것은 너무 포괄적인 대상을 설정할 것은 아닌지 따위의 것들 말이다.
-스스로의 생각에 갇히지 말자. 내가 지금 알고 있고, 내가 지금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굉장히 불안정한 1인칭의 경험과 가설에 기반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생각을 열고 다른 이와 가치관과 사상들을 받아들이며, 나 자신의 지평을 끊임없이 넓혀나가는 사람이 되자! - 키메라
이 에피소드는 자세한 서술보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개 하려 한다.
"좀 고상하게 질문할까요? 자신의 후손이 자신의 기준에 딱 맞아야 한다고 믿고, 여자가 자신의 기준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된다고 믿고, 자신의 출생이 자신의 기준에 딱 맞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이유에서야 한다고 믿고,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볼 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발전시키기보다 자기 기준에 맞을 때까지 상대방을 파괴하려는 게 뭐죠?"
- 이 문장은 스스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던 키메라를 말로 무너뜨린 헐스루인 공주가 상황을 설명해주며 던진 말이다. 남자의 이기적이고 괴상할 정도로 자의식 과잉인 점을 위트 있고 과장되게 표현한 저 문장은 내가 이 책을 다시 꺼내볼 때마다 가장 먼저 키메라편을 읽으며 낄낄거리는 자아성찰용 문장이다.
#3 책 소감
읽고 다시 읽다가 다시 한번 꺼내어 읽어봐도 재미있는 이영도 작가의 판타지 소설.
마법과 이종족이 존재하는 그 어딘가 행성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고 그냥 글로 옮긴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자세한 설정과 입체적인 인물들의 행동.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만 가지 일들 중 가장 신기한 일들을 추려 모아 놓은
어딘가 존재할 것만 같은 세계의 신나는 일상집